수묵
/송진권
저 노랑을
저 파랑과 하양과 붉음을
지나지 않으면 어스름이 내려오지 않는다지요
거무죽죽한 날개를 떨쳐입은
숭숭 검은 털 배긴 어둠이 오지 않는다지요
나는 등롱에 기름도 채워 두고
심지도 가지런히 잘라두었지만요
기다란 더듬이
소리 없는 날갯짓의 올빼미 같은 어스름이
검은 수레를 타고 곳곳에서 번지듯 스미어 올 때
차마 불을 그을 수 없었음을
뭐라고 해야 할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야기하지 않던 사람아
차마 얘기할 수 없어서라며 고개 숙이던 사람아
묵의 농담만으로도
충분히 한세상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을
온갖 색이 섞인 묵을
명과 암 그 언저리에서 촘촘히 번지는 색 중에
내가 모르는 그 어떤 희미한 빛을
붉은 낙관 찍어 벽에 걸어두렵니다
이처럼 밝은 분간이 너무나 무서워서요
스무고개
/송진권
나는 아직 꽃이 터지기 전 녹두빛 도라지 꽃망울 속에 있고요
그 사진 속에 있는 문 안에 숨어 있기도 했습니다.
붉은 물 돌기 전의 앵두나무 이파리 속에도 있고요
감자의 움푹한 씨눈 속에도 숨어 있었습니다
나는 목련의 겨울눈에서 잠을 잤고요
개구기 메뚜기 토끼의 뒷다리에 숨어 있었고요
방금 그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뚜껑을 닫은 상자 속에 들었고요
놀란 눈을 한 그 아이가 급히 삼켜버린 것이고요
아까 그 주정뱅기 아저씨가 울며 감춘 술병 속에도 있었습니다
나는 방금 떠난 기차의 기적 소리이고요
어젯밤 지나간 소나기를 따라갔기도 하고요
과일 장수 아주머니의 전대 속에 돈과 함께 있었고요
포장마차 진열장 고등어 뱃속에 숨어 있기도 하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기 전
버튼을 누르던 떨리는 손가락에도 있었습니다
모든 곳에 있기도 하고
어느 곳에도 없기도 하고
아무 데나 있기도 하지요
내가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청춘 고백
/송진권
오래된 숲에서 그놈을 사로잡아 왔습니다
놈은 발굽이 무르고 뿔이 있었으나 뭉툭했습니다
목을 옭아매고 사지를 묶자 그 짐승,
눈만 희번덕이며 저항도 하지 못했습니다
겁에 질린 짐승의 울음소리라니
미나리꽃 하얗게 우거진 도랑에서 놈의 멱을 땄습니다
흰털을 적시며 핏물은 도랑물에 낭자하게 풀어지고
숫돌에 칼 갈아 가죽 벗겨 널어놓고
우리는 놈의 배를 갈랐습니다
뱃속에는 형체가 갖춰지지 않은 분홍색의 새끼들이 아홉 마리 들었고
우리가 칼을 대자 그것들은 뿔뿔이 달아나려고 몸을 뒤척였습니다
탯줄을 자르고 우리는 그놈들을 하나하나 물에 흘려보냈습니다
큰 통에 내장은 내장대로
고기는 고기대로 나눠 담고
둥글게 모여앉아서 생간을 먹었습니다
굵은 소금 찍어 붉게 붉게 웃어가며
탁한 술을 나눠 마시고
피 묻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물가에 앉아 손에 묻은 핏자국을 닦았습니다
낄-낄-낄-낄, 물에 비친 얼굴들은
기묘하게 일그러져서 일렁이며 흘러갔는데요
그 표정들을 물에 흘려보내고
무표정한 얼굴로 칼과 도구를 챙기고
저마다 고기를 나누어 가지고 우리는 돌아왔습니다
어슴푸레한 데
/송진권
저 어슴푸레한 데는 뭐가 있느냐
무엇이 살고 있느냐
어둑시니 떼가 쪼그려 앉아 있느냐
분꽃이 피느냐
도둑이 웅크리고 있느냐
밝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고
희부윰하니 들깨 같은 별 한 자루 쏟아진 데에
박각시가 사느냐
방상시가 사느냐
박각시 쫓아낸 호박벌이 있느냐
실꾸리 무릎에 끼고 앉아 감아 들이는 할머니가 사느냐
오오, 우리들이 함께 무찔렀던 어슴푸레한 데
무엇이 있느냐
무엇이 쭈그려 앉아
흑백이 부동인 채
턱을 괴고 앉아 눈망울 디룩디룩 굴리며 여길 쳐다보느냐
저 죽을 줄도 모르고 쭈그려 앉아
불칼을 등허리에 맞고 있느냐
다시 그 저녁에 대하여
/송진권
뭐라 말해야 하나
그 집 지붕 아래 수수깡 드러난 처마에 대하여
서까래를 밟으며 지나간 검댕 묻은 전깃줄을
꼬옥 쥐고 있던 애자에 대하여
처마마다 한 발이나 되게 매달리던 고드름들에 대하여
댕그랑댕그랑 톰방톰방 뚝뚝 똑똑
오도록 오독 하며 함께 살던 소리들에 대하여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의 사진이 걸린 파리똥 앉은 사진틀에 대하여
저녁거리 시래기를 내리던 마른 손에 대하여
서까래에 매달렸던 씨갑시 봉지들에 대하여
제비 똥 떨어지지 말라고
제비 집 아래 달아둔 송판에 대하여
처마 밑에 매달린 둘둘 말린 멍석이며
양말 주머니 매달고 있던 기다란 감전지에 대하여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에 놀란 개가
컹컹 짖던 것에 대하여
어떻게 다 말해야 하나
그득 불을 문 아궁이에 대하여
처음 내게 불을 피루는 걸 알려주던 이에 대하여
재를 헤집으면 나오던 감자알이며
아궁이 속에 살던 강아지들에 대하여
어떻게 다 말해야 하나
숯검댕 묻은 굴뚝새에 대하여
시래기 삶는 내며
쇠죽 끓이는 냄새를 맡고
빼꼼히 들여다보던 송아지 콧구멍에서 나오던 허연 김에 대하여
송진권 시인 2004년 <창작과비평> 등단. 시집 「자라는 돌」 외 동시집 「새 그리는 방법」 외
어떤 시는 시인에게 체화 된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가 있다. 시인이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느꼈던 그 모든 것들이 시인이라는 항아리에서 숙성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의 구조와 형식 화자가 시인이라고 말해도 좋은 것들이 있다. 송진권 시인의 시를 읽고 시인 백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자연대상물 또는 정겨운 시골의 이미지를 가져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말하는 형식과 구조가 백석의 것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시는 고백적이고 그런 시에게 서정을 느낄 수 도 있었지만 수묵에서 "밝은 분간이 너무나 무서워서요"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이 시인이 그저 백석 시의 구조와 형식 또는 시를 쓰는 스타일이 비슷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섭다는 말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어떤 일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다. 시인은 현재 지진계처럼 변해가는 어떤 기류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시를 더 찬찬히 읽으면서 알아가고 상상하고 느끼는 것이 송진권 시인의 시를 읽는 또 다른 재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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