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모 몇 뿌리
/윤후명
중국 청두를 떠나 도착한
티베트 라싸의 조캉 사원이었다
옛 토번(土蕃)의 송첸캄포 왕과 당나라 문성공주의 결혼을
나는 역사 저편에서 살려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앞길의 인파 사이를 헤쳐 가다가
차마고도 순례객들을 마주쳤다
아, 그들이 마침내 이곳에 왔구나
그곳에서도 오체투지를 하는 그들에게
나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들은 도대체 그렇게 얼마나 걸어 왔을까
그런 다음 그들 누구는 스님이 되고
누구는 패모나 동충하초를 캐러 간다는 노래가 떠올랐다
나는 그들이 인도로 가든 네팔로 가든 부러워하고 있었다
내 삶은 바람에 날리다가 사라질 운명 아니던가
서울로 돌아온 나는 이곳저곳 기웃거려서
패모 몇 뿌리를구하여 뜰에 심을 수 있었다
올해도 뾰족한 고동색 새싹이 돋아난 패모 몇 뿌리
밤편지를 쓰리라
/윤후명
나는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엉겅퀴꽃이 핀 시골길인지도 모른다
컴컴한 도시 뒷골목 어디인지도 모른다
나 혼자만이다
살 만큼 사는 동안
시골 들밭길 도시 뒷골목
걸을 만큼 걸었다
애포에 내가 꼭 가야 할 길은 없었다
그러므로 '어디론가'인 것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네댓 명 앉는 회교 교당에도 엎드리고,
티베트에서 작은 곰파를 거쳐 우리의 시골 주일학교를 지나,
그리고 해인가 말사에서 불목하니 행자가 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딘론가 걸어갈 뿐인 것이다
내 앞에 있는 것은 한국의 꽃 피는 봄날
아, 그대여
나는 기나긴 편지를 쓰고 싶을 뿐이다
밤새워 기나긴 편지를 쓰고 싶을 뿐이다
나의 패엽경(貝葉經)
/윤후명
스리랑카에서는 패엽경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이 야자잎이었던가
서울로 돌아와 글자를 쓸 때면
야자잎이 떠올랐다
어느새 나는 패엽경을 엮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한 잎사귀 한 잎사귀, 한 글자 한 글자
엮고 있으면
언제 한 권이 책이 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야자잎을 펴고
나도 모를 무슨 글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세상에서 버림받고
어느 뒷방에 홀로 버려져 있을 때
남몰래 읽을 책을 쓰고 싶었다
나도 모를 무슨 책을
그렇게 세상 어느 골짜기에서 홀로
나만의 패엽경을 이루며
살다가 가고 싶은 것이었다
양치기 백석(白石) 시인
/윤후명
강릉 구정면에서
백석 시인의 당나귀를 탄다
당나귀는 그의 시에서처럼 응앙응앙 울고
나는 남대천 물길을 따라가고 있다
그 예전 피난살이 하느라고 나 어머니와 함께 엎드려 있던 땅
저기에 백석 시인의 시가 있는 것이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삼수갑산으로 쫓겨가
양치기가 된 그를 따라 압록과 두만 두 물길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를 따르자면 당나귀를 타고
양들을 뒤따르면 되리라
이것이 구정면의 내 운명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일러야 한다
오늘도 남대천은 멀리멀리 흐르는데
나는 응앙응앙 좇아가고 있다
자하문 고개
/윤후명
자하문 고개를 넘어
김환기 미술관과 윤동주 문학관을 지나간다
벌써 이 고개 넘어다닌 지 30여 년
먼저 간 달구지들은 어디론가 가고
과수원 길도 지워졌다
종이 만들던 시냇물은 어디까지 흘러갔을까
춘원 선생도 뵐 길이 없고 나만 홀로 머흘고 있다
치맛자락에 복숭아 자두를 따주던 처녀들도 사라져간 이 골짜기
삶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누군가 들려준다
오늘 이 고개 위에 서서
나만의 옛길을 믿기로 하건만
달구지 뒤둥거리던 뒷모습만 나를 남기고 있다
그 길에서 나는 달구지 뒤를 따라
어디로인가 나를 보내고 있다
윤후명 시인 1967년<경향신문>시, 1979년<한국일보>소설 당선. 시 전집『새는 산과 바다를 이끌고』 등, 소설집 『윤후명 소설 전집』(12권)이 있음. 이상문학상, 동이문학상 등 수상. 연세대, 국민대 대학원, 체코 브르노 콘서바토리 교수 역임.
화자는 과거의 경험, 회상을 시 초반에 가져온다.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보여준다. 그리고 현재로 돌아와 거기서 느꼈던, 깨달았던 또는 복합적인 감정을 엮어 새로운 실천의 행동으로 보여준다. 패모를 찾아 심거나 패엽경을 만들거나, 결과적으로 시인의 시는 그림움과 고백, 후회, 반성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구조는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다. 적절한 묘사와 정보제공으로 독자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느낄 수 도 있지만 화자의 상태에 대해서 화자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는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쉽사리 그것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시를 읽으면 다 이해 된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더 많이 생각할 여지를 남겨 둔 시편들이었다. 차분해지는 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