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인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신용목
꿈에서 오랜 형의 집에 찾아갔는데, 형은 진즉 떠나 없다 말하는 노모 뒤에서 연신 고개를 흔들며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아이의 눈빛이 꼭 저녁 같아서,
노을은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사라질 수밖에 없는 시간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노모는 문을 닫지도 않고 수돗가에 내려서서 물을 떠 한 모금 들이켜고는
그대로 내게 건넸다. 바가지 붉은 속 같은 노을 속에 여름 해가 고향집처럼 담겨 있었다.
잠을 깬 나는 오랜 형의 번호를 찾아보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화장실에 앉아 물을 세 번 내렸다. 화장실에는 창문 대신 거울이 열려 있었고 전등이 환하게 비쳤다.
마모
/신용목
돌 위에 돌을 올려놓는 모습을 보았다. 이 많은 돌들은
하나의 돌에서 깨어져 나온 것일까.
더 작은 돌들이 붙어버린 것일까.
돌 위에 돌을 올려놓는 모습이
돌 위에 돌이 놓여 있는 모습으로
바뀌고
몸에 마음을 올려놓는 일을 생각했다. 마음에 몸을 올려놓는 일이었으면 쉬웠을까.
같이 태어났는데, 왜 마음은 매번 몸을 무너뜨리는 것일까.
몸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일까.
이 많은 마음이 흩어져 있는
하나의 몸.
지금 그것은 정류장에 있다, 자신이 있는 곳을 부인하기 위하여 자신만의 이름을 가진 정류장에
버스 안에 있다, 제자리에서 끝없이 이별을 시연하기 위하여 꼼짝없이 앉아 있고,
버스는 정류장에 멈춘다.
그것은 내린다. 다른 이름을 가진 같은 장소에
다른 정류장을 다음 정류장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버스는 떠나고
그것은 횡단보도 앞에 있다. 자신이 있는 곳이 건너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하얗게 가로 그은 선 사이로 바퀴 소리를 내며
돌들이 구르고
마침 다른 그것이 다음 그것을 쳐다본다. 다른 그것이 다음 그것을 알아본다.
그것의 이름을 떠올리자
돌들이 멈추고
그것은 정류장이 된다. 한때 거기서 버스를 기다렸다. 빨간불에 걸린 버스는 오지 않고
기다림을 보여주기 위하여 신호등은 깜빡이고
이제
정수리 위로 맹렬하게 떨어지고 있어서, 노을 아래서도 무언가 써야 한다면
양산이 좋을지 우산이 좋을지,
모르는
마음은 축축한 몸을 이끌고 감자탕 집으로 간다. 몸속에 빨간 국물을 떠넣는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빨간 국물을
마음은 노을로 바라본다.
빨깐 신호에 걸린 것처럼
고요
/신용목
수평선이 오건지의 몇 번째 칸인지 알지 못해서 태양을 어떤 음계로 불러야 할지 몰랐다.
다가가면, 촘촘한 계단으로 멀어지다
어느 순간 낭떠러지를 보여주는
저 마디에서 밤은 목소리를 잃었을 것이다. 날마다 다른 박자로 밀려오는 파도,
어존에 뜨는 별은 물속에서 건져 올린 악기이다. 밤하늘을 메운 악단이다.
밀물을 커튼으로 밀며, 달빛은 젖은 악보를 그림자로 흘려보낸다.
어부는 제 인생을 가사로 쓴다.
신용목 시인 200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나의 끝 거창」「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 시간에 온다」가 있음
「타인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를 읽으면서 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른다. 주관적으로 흐른다. 이런 이야기를 떠올렸다. 예전에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에 대해 읽은 기억이 났다.크로노스의 시간은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객관적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은 특정 의미가 부여된 주관적 시간을 의미한다. 예를들면 구로에서 신도림으로 이동하는 열차가 있다고 하자. 그 열차는 2분이 걸리고 그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이다. 변하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철 안에 한 사람이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자. 전철은 2분이면 신도림에 도착한다. 그러나 화장실이 급한 그 사람에게는 2분이 하루처럼 느껴질 수 도 있다. 이런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이라 이해했다. (부정확하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어쨌든 시를 읽고 가장 중요한 문장을 고르자니 역시 '노을은/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사라질 수밖에 없는 시간을 보여주는 거라고/생각했는데,' 문장이다. 사라질 수밖에 없는 시간이란 무엇일까. 이 문장에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시 안에서도 시간은 역행했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꿈이라는 매개체로 화자는 시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그리고 사라지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보였다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사유를 적어나간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이미지화 하여 시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그것이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독자의 인식에 작은 틈을 새긴다.
어제는 내가 쓴 시를 정리했다. 몇 편의 시를 모아서 투고를 해보려 했다. 고르고 고르며 정말 많은 쓰레기 만들어 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물이라면 구매를 하고 사용을 하다가 낡으면 쓰레기가 되겠지만 내가 쓴 시는 그냥 처음부터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내가 무엇을 한 건지 반성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쓰레기들을 사랑한다. 밑거름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시를 쓸때 중요한 것들을 생각한다. 이미지, 묘사와 진술, 그리고 시인의 확고한 태도와 포즈. 나는 어떤 시를 쓰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이 써야 한다. 부족하고 그것이 쓸모없고 누군가에게 보여질지 아닐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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