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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시집추천, 시인추천]웹진 님Nim 신작시 2023년 10월호 Vol.28 - 정끝별시인 「함박눈이 그렇게 흑백의 점묘화를 그리던 한밤 내」외 1편

by 꾸꾸(CuCu) 2023.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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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이 그렇게 흑백의 점묘화를 그리던 한밤 내

 

 

 

/정끝별

 

 

 

그래 우리는 둘이서

 

함박눈이 한밤의 길바닥에

번지는 잉크처럼

검은 그리자를 피웠다 사라지는 걸 보았지

 

가로등 아래서

 

흰 점 한 점은 다다다

흰 점 만 점은 더더더

뜨겁게 그을린 내력 위에 살그머니 내려 앉자

 

금세 지워지는 한 번의 생

무슨 자서전이길래 저리 하얗게 지우려는 붓끝일까

 

먼 데서 온

 

한 편의 시처럼

그것참 행간 깊은

 

 

 

 

사랑할래요?

 

 

/정끝별

 

 

점점 크게 보일 뿐인데

점점 크게 들릴 뿐인데

 

나는 왜 네게 더 가까워졌다고 믿는가

네가 더 짙어졌다고 믿는가

따듯해졌다고 믿는가

 

너는 내가 믿는 나의 너일 뿐인데

나는 내가 믿는 너를 보고 있을 뿐인데

 

이 자리를 벗어나면 우린 서로 다른 사람일 텐데

나는 왜 너를 너라고 믿는가

 

닭이 품은 닭의 알처럼

아주 잠시 마주하는 혁명처럼

지치지도 않고 네가 궁금해서

 

내가 잊을 때까지 너는 너라서

끝내 실패하기 위해서 나는 너를 믿는가

 

네가 아닌 네가 닿을 때까지

아무도 아닌 네게 닿을 때까지

 

 

시인의 말

"새 쫒는 소리에 새 모여든다." 북을 잡은 선창꾼 소리를 받아 예닐곱의 달구꾼들이 긴 막대기를 들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며 "에해라 달구를 후창했다.

 

하관 후 온 가족들이 한 삽의 흙을 세 번에 나누너 헌토를 했고 이어 석회를 섞어 뿌린 흙으로 덮어 엄마의 유택을 다지면서 부르는 달구꾼들의 노래였다.

 

울음에 묻혀, 선창하는 달구꾼의 노랫말은 뭉개져 흩어지긴 했으나 후창하는 달구꾼들의 후렴은 점점 더 다부졌다. 그렇게 엄마는 땅에 묻혔다. 죽음을 밟는 노래, 제 모태에서부터 시작된 죽음을 다지는 노래와 함께.

 

달구질이 끝나고 제를 올리자 달구꾼은, 온 가족들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둘레석이 세워질 묘지 주변을 밟으며 세 번을 돌고 내려가라고 했다. 내려가면서는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우리는 그렇게 엄마의 유택을 내려왔다.

 

'새 쫒는 소리에 새 모여든다'라는 달구꾼의 노랫말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채우려 할수록 비워지는, 아니 비워야 채워지는, 그런 순리쯤은 알고 있다. 내 몸을 준 엄마와 엄마의 죽음을 밟는 게 내 삶이었듯, 끝을 밟는 게 시작이고 뒤돌아보지 않아야 새로운 길이 열리는 이치쯤도 알고는 있다. 그 순리와 이치를 나는 시에세 배웠고 그 자체가 시라고 믿고 있다.

 

 

 

정끝별 시인 1988년 문학사상으로 시,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평론 등단.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은는이가』,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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