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박상순
그럼, 수요일에 오세요. 여기서 함께 해요. 목요일부턴 안 와요. 올 수 없어요. 그러니까, 수요일에 나랑 해요. 꼭, 그러니까 수요일에 여기서...
무궁무진한 봄, 무궁무진한 밤, 무궁무진한 고양이, 무궁구진한 개구리, 무궁무진한 고양이들이 싸뿐히 밟고 오는 무궁무진한 안개, 무궁무진한 설렘, 무궁무진한 개구리들이 몰고 오는 무궁무진한 울렁임, 무궁무진한 바닷가를 물들이는 무궁무진한 노을, 깊은 밤의 무궁무진한 여백, 무궁무진한 눈빛, 무궁무진한 내 가슴속의 달빛, 무궁무진한 당신의 파도, 무궁무진한 내 입술,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월요일 밤에 ,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다음 날, 화요일 저녁, 그의 멀쩡한 지붕이 무너지고, 그의 할머니가 쓰러지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땅속에서 벌떡 일어나시고, 아버지는 죽은 오징어가 되시고, 어머니는 갑자기 포도밭이 되시고, 그의 구두는 바윗돌로 변하고, 그의 발목이 부러지고, 그의 손목이 부러지고, 어깨가 무너지고, 갈비뼈가 무너지고, 심장이 멈추고, 목뼈가 부러졌다. 그녀의 무궁무진한 목소리를 가슴에 품고, 그는 죽고 말았다.
아니라고 해야 할까.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월요일의 그녀 또한 차라리 없었다고 써야 할까. 그 무궁무진한 절망, 그 무궁무진한 안개,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박상순 시인 1962년 서울특별시 충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91년 계간 <작가세계> 봄호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데뷔. 『6은 나무, 7은 돌고래』, 『마리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목화밭 지나서 소년은 가고』, 『Love Adagio』, 『슬픈감자 200그램』, 『밤이, 밤이, 밤이』 등이 있다. 현대시동인상, 현대문학상, 현시작품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
1연 약속. 누구 누구에게 말하는 걸까. 그녀가 그에게. 정말. 다른 연을 읽고 추측해야 하니까. 그런 이해범주로 이 시를 읽는다고. 상상해야지. 무엇을 하기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약속을 했지. 화요일 말고. 수요일에만.
2연. 무궁무진의 반복. 반복은 과거에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에서 오지. 무궁무진. 그녀가 하는 말? 아니면 그가 하는 말? 알 수 없지. 다시 상상. 질서를 만들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재밌잖아. 독백.
3연. 서사와 묘사. 그의 죽음과. 기묘한 초현실적인 그림.
4연. 그도 아니고 그녀도 아닌 화자의 독백. 이렇게 형식을 넘나든다고?
언어는 이미 이해 바깥의 범주에 있다. 있는 그대로 읽기. 악보처럼 읽기. 음악처럼 읽기. 그림처럼 읽기. 사진처럼 읽기. 기차소리처럼 읽기. 그렇게 읽기. 그래야 시의 서정이 오는 거 아닌가.
박상순의 시를 분석하고 이해한다는 건. 언어의 바깥을 이해한다는 말. 내일 저녁 신촌역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는 일. 분석적으로 읽되. 마음으로 와닿게 하기. 그거면 된다. 그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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