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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시집추천, 시인추천, 시추천, 문예창작]2023년 12월 Vol.30 김경미 시인 「이사 정보」외

by 꾸꾸(CuCu) 2023.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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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정보

 
 
 
/김경미
 
 
 
집을 내놓자 사람들이 보러 왔다
 
부동산 사장은 좋은 말만 하려 하고
나는 낡은 내 집의 단점을 귀띔하려고
계속 틈을 살폈다
 
부동산 사장은 돌아가서 전화를 했다
 
사람들이 집 볼 때
첫눈에 제일 많이 좌우되는 곳이
두 곳이에요
그 두 군데만 수리하면 완전히
새집 같아져요
 
나는 벽지와 바닥인 줄 알았는데
이십육 년 전문가에 의하면
 
화장실하고 주방, 두 곳입니다
주방은 이미 고치셨으니
화장실만 완전히 새로 수리하세요
 
화장실을 고쳐준다는 조건으로
집을 다시 내놨다
 
내가 고쳐주고 싶은 건
실은 창문들인데
나라면 거길 고쳐 달라고 할 텐데
 
돈이 많으면 창문부터 고칠 텐데
 
더 많으면
창문 밖 아파트 화단 풍경도 고칠 텐데
 
맞은편 아파트 밤의 거실 조명도
전부 다 바꿔줄 텐데
 
나도 빈집을 보러 갔다
 
베란다 배수구에
작은 풀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정원을 얻은 듯 맘에 들어하자
동행했던 집 수리 전문가 친구가
집이 하자 있어 안 나간다는 증거라고
혀를 찼다
 
돌아오면서 하늘에 난
각종 창문과 풀꽃들을 보았다
 
그 투명 액자 속 구름들이
첫눈 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창문들 다 바꾸는 조건으로
집을 거둬들였다


특보

 
 
 
/김경미
 
 
 
문자가 왔다
 
호의 특보가 내려졌으니
우산 챙겨 나오라고
 
보낸 사람의 실수인지
읽은 사람의 착오인지
 
아직은 쨍쨍한 하늘
 
얼마만의 예보일까
 
거세게 쏟아져 내릴
호의 맞으러 서둘러 나간다
 
양산 겸 우산처럼 챙겨 입고

 


꽃 지는 날엔

 
 
 
/김경미
 
 
 
꽃 피는 날엔
누구와도 다투지 않기로 한다
 
꽃 지는 날엔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는다
 
연두색 잎들 초록색으로 바뀔 땐
낡은 구두로
바다 위 돛단배와 물고기를 만든다
 
어디선가 기차 지나가는소리 들리면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고
 
저녁 종소리 들릴 듯 말 듯 기억이
자꾸 고개를 돌리면
내 잘못을 용서한다
 
혀로 망친 날은
양쪽 다 유보한다
일주일이나 보름 동안 별빛 보며
세 시간 이상씩 탕감해 본다
 
안 돼도 할 수 없다
 
아무 것도 믿지 않아서 출구가 없었던 날들
 
이십 대가 다 가도록 아름답지 못했고
아름답기도 전에 이십 대가 다 갔으니
 
서른과 마흔에는 갈수록 산뜻해져야 한다
 
그런 봄날의 믿음
차츰과 주춤의 간격들
 
가방 무거운 날엔 입술도 무거워야 한다
종일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다
 
눈물을 잊으면 부족한 게 점점 많아져
얼굴이 곤두서니
 
비 오는 날에도
비 오지 않는 날에도
아무와도 다투지 않기로 하지만
 
꽃 피는 날에도
꽃 지는 날에도
후회가 많아서 운다
 
가장 쓸모 있는 건
뉘우침 뿐이라고
 
꽃 피는 날에도 꽃 지는 날에도


연필통

 
 
 
 
/김경미
 
 
 
그 무덤엘 가니
납작하게 누운 주검의 배꼽쯤에
연필꽂이통이 놓여있었다
 
다른 무덤들에는 
립스틱 자국과
거기까지 오는 지하철표와
미술관 입장권이며 동전들이 가득한데
 
'이게 다예요'
 
그녀의 책 제목처럼
 
잔뜩 요약된 무덤이었다
연필통이었다
 
배꼽 같은 연필과 볼펜들이 가득했다
 
나도 모나미 볼펜 하나 꽂았다
한국에서 왔어요
모나미는 당신 나라 말로 나의 친구여
 
한나절 그녀를 생각했다
볼펜을 생각했다
어릴 적 친구라도 되듯이
 
볼펜  심처럼 말라서
옥상이 유일한 친구였던 시절이 있었다
 
떨어질 생각은 아니었다
배꼽이 있으니까
설사 떨어져도 무사하리라
 
지금도 문구점을 지나갈 때면
볼펜들이 부른다
나의 친구여
 
번번이 친구를 사 오지만
친구도 대체로 내 마음 같지는 않은 법
 
한나절 내내 볼펜을 생각하지만 
대체로 하고 싶은 생각과
하는 생각이 
같지는 않은 법
 
그 무덤에 다시 가서
모나미 볼펜 한 자루 더 꽂을까
 
나의 친구여
나는 아직 시작도 못 한 기분이지만
떨어질 생각은 없답니다
 
배꼽 자국이 있으니까
고백하러


햇빛

 
 
/김경미
 
 
 
햇빛에 빨갛게 달궈진
돌바닥에 누웠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내 안의 돌과 모래가 흘러나와
햇빛을 따라 올라가
먼지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햇빛이 되어 내려왔다
 
뼈만 남았던 몸에
다시 뜨거운 얼굴이 생기고
팔 다리가 붙고
궁둥이가 그득해졌다
 
저쪽 마담 가 풀밭의 풀처럼 쑤욱
키도 자라고
두 눈도 커지고
 
생일도 아닌데
잘 달궈진
생일 축하 케익도 왔다
 
신생아 같은 구름들이 버둥대는 하늘에다
 
깜빡 잊고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한테도 못한 말을 한 뻔했다
 
꿈에서 깨어나
잔뜩 뒹굴대면서
온 세상과 함께 뒹굴대면서

 


시인의 말

 
극심한 두통에 쩔쩔매다 보니 햇빛 속 그 돌바닥이 더욱 그립니다.
그 그림움이 두통을 낫게 해주겠지.
 
김경미 시인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외 노작문학상, 서정시학 작품상 수상.



화자의 의식이 그리고 말하는 방식이 그리고 내뱉는 말들이 나를 돌이켜보게 해서 좋았다. 직접적인 진술이 설명처럼 보였지만 아직까지 써 왔던 시의 힘이 있기 때문일까.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거슬리지도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배우고 간다. 좋은 시를 써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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